영도 투어 심층 르포 1편 고등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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〈고등어와 한국인의 기억〉
바다의 생명줄, 밥상의 추억
부산 영도 앞바다. 회색빛 파도가 부서지는 항구에선, 아직도 이른 새벽이면 고등어를 실은 어선들이 들어온다. 수십 년 전과 다를 바 없는 풍경. 다만 그때와 달라진 건, 아이들의 손에 쥐어진 동전이 더 이상 고등어 몇 마리 값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사실뿐이다.
가난을 지탱한 국민 생선
1960~70년대, 가난했던 시절. 한국인의 밥상에 고등어만큼 자주 오른 생선은 없었다.
학교 급식 도시락 뚜껑을 열면 으레 고등어 구이 한 토막. 비린내를 감추기 위해 구운 껍질이 조금 타 있으면 오히려 밥맛이 더 났다. 아버지의 막걸리 안주, 어머니의 반찬 걱정, 아이들의 도시락 반찬이 모두 고등어 한 마리에 담겼다.
고등어는 값이 싸면서도 영양이 풍부했다. 단백질, 칼슘, 오메가3. 영양학적 설명이 필요 없었다. “밥 잘 먹었다”는 말 속에 이미 고등어의 힘이 있었다.
집안의 제사상, 골목의 부엌
한국의 의례에서 고등어는 제사상 단골이었다.
조상에게 올리는 밥상, 제례 음식 중 빠지지 않고 차려지는 생선. 비늘의 은빛은 ‘깨끗함’을, 속살의 흰 빛깔은 ‘성실함’을 의미했다.
골목마다 저녁이 되면 간장 양념에 자작하게 끓여내는 고등어 조림 냄새가 퍼졌다. 무가 달큰하게 익어갈 즈음, 밥상 위에 놓인 고등어는 이웃과 함께 먹는 음식이기도 했다. “한 토막 더 드셔요”라는 말과 함께, 사람들 사이의 정이 오갔다.
고등어의 기억, 한국인의 기억
세월이 흐르며 고등어는 단순한 생선을 넘어 한국인의 집단적 기억이 되었다.
“엄마가 해주던 고등어 조림이 생각나”라는 말은 곧 어린 시절,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가족의 기억을 불러낸다.
은빛 비늘 속에는 바다의 거친 숨결과 함께, 한국인의 생존과 정서가 스며 있다.
한 마리 고등어가 불러내는 기억은 단순한 식사 이상의 것이었다. 그것은 곧 **“살아냈던 시대의 기록”**이었다.